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회선 사건 (문단 편집) === 국회의원들의 남하 === 1923년 5월 13일 [[리위안훙]]이 사퇴하자 5월 14일 양원은 중의원 의장 우징롄이 사회를 맡은 가운데 연합 담회회를 열었다. 우징롄은 익우사에 우호적인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으며 차오쿤 옹호파 의원들은 국무원이 대총통 직무를 대행하여 대총통 선거 사무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보성은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선출하는 것에 반대하며 직예군벌과 고능위 총리가 리위안훙을 핍박하여 하야하게 한 것을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차오쿤 옹호파들이 저보성 등의 발언을 저지하고 국무원이 대총통 직무를 대행한다는 결의를 발표하였다. 10월 16일, 양원은 연합회를 개회하여 13일 이후에 리위안훙이 발표한 명령은 효력이 없다고 의결했다. 국회 내부에서 리위안훙 하야에 대한 정쟁이 벌어지자 [[쑨원]]은 참의원 유성우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국회의원들에게 남하할 것을 촉구했고 [[안휘군벌]]인 절강독군 [[루융샹]]도 의원들에게 남하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톈진에서 각 의원들에게 여비로 500원을 지급하고 상하이에 도착하면 매월 300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익우사 내부가 분열되어 우징롄 등은 베이징에 남아 익우사를 민헌동지회로 개칭하고 회선을 지지했지만 저보성 등 201명의 국회의원이 연명으로 6월 22일 연합회의 의결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전보를 전국에 통전하고 국회를 남쪽으로 옮기는 운동을 벌여 상하이로 남하, 반 회선 운동을 진행했다. 정학회도 헌정사로 개칭하고 상하이로 남하하여 반회선 운동에 동조했으며 민우사, 정학회, 안복계 소속의 여러 의원들도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7월 14일까지 상하이에 200여명의 국회의원이 모여들었다. 8월에 들어서는 상하이에 개회 정족수에 달하는 숫자의 국회의원들이 모여들면서 직예군벌 내부에는 비상이 걸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